** 그라나다 **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남부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로지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서쪽
시작 지점인 북쪽 해발 738m의 고지대에 자리하며 이름은 이지역의 특산물인 석류(granda)의
에스파냐어에서 유래 하였습니다.
현재와 중세, 아랍과 유럽이 공존하는 도시이면서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세력의 최후 근거지였어요.
지중해성 기후로 1년 내내 따뜻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스페인 주요 도시에 비해 물가가 저렴한
편입니다.
알바이신의 언덕은 로마시대부터 점령 되어 왔다는 사실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밝혀졌어요.
로마 멸망 후 서고트족이 지배하였고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왕국 지배,
1492년 레콩키스타가 끝나기 직전까지 알바이신의 인구는 6만명에 달했지만 이후 대부분의
이슬람인들이 떠났고 남아 있던 사람은 개종하였습니다.
마지막 왕조인 나스르 왕조가 패한뒤 모리스코 추방이 일어날 때까지 나스르 왕조 유민들이
살았던 곳이예요.
알바이신 지구에는 모로코, 북아프리카, 아랍계 이민자들이 많습니다.
* 알함브라 궁전 *

이슬람 건축의 정수이고 붉은 철이 함유된 흙으로 지어진 '붉은 성' 이라는 뜻이예요.
1238년 나스르 왕조를 세운 무함마드1세가 건설했고 본래 군사 요새로 건설 되었다가 왕실의
거처로 바뀌었습니다. 궁전은 여러대에 걸쳐 증축 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4세기 유수프 1세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 5세 재위 당시 갖춰졌어요.
레콩키스타로 함락 된 이후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궁전으로
사용하면서 기적적으로 보존 됐습니다.
하지만 탑들이 상당 부분 철거 되었고 모스크 자리는 성당으로 대체 되었어요.
이후 버려져 있다가 19세기 이후에 복원 되었습니다.
왕족이 거주하던 나스르 궁전, 군사 요새 역할을 했던 알카사바, 정원이 아름다운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 스페인이 만든 르네상스 양식의 카를로스 1세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단일 건축물이 아니라 군사, 왕족, 귀족들의 주거지의 복합 공간으로 이슬람의 예술과 다양한
건축 기술이 혼재된 곳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성수기,비수기를 가리지 않고 예매가 필수예요
▶알카사바

알함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복원 되지 않았고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군사들의 숙소,목욕탕 등 생활시설터와 성탑이 있는데 여기 오르면 그라나다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어요. 꼭대기에는 정복을 기념하여 이사벨여왕이 종을 걸어 놓아 벨라의 탑이라고
부릅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했을때 여기서 막사를 치기도 했어요.
▶카를로스 1세 궁전


합스부르크가문의 수장,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스페인왕, 이탈리아군주 등 17개 국가의
왕관을 썼던 카를로스1세. 이사벨라 여왕의 외손자, 막시밀리안 황제의 친손자로 유럽 절반이
넘는 영토와 신대륙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상속 받았고 16세기 유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카를로스1세는 세고비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라나다로 신혼여행을 왔어요.
가톨릭 군주로서 이슬람 궁전에 머물 수 없다 하여 나스르궁 안에 가톨릭식의 방을 만들기도
했고 정복자로서 알함브라 건물 몇 채를 허물고 거대한 르네상스 건물을 짓게 합니다.
외부는 사각형 내부는 원형으로 지어졌어요.
왕궁을 짓기는 했지만 넓은 영토를 통치하러 돌아다니느라 살지는 못하고 펠리페 2세 때에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겨 그라나다는 잊혀진 도시가 되어갔습니다.
웅장하기는 하지만 알함브라 다른 궁전들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아쉬운 감이 있네요.
▶나스르 궁
무함마드 1세에서 시작 되는 나스르 왕조 지배자들의 집무실이자 왕실 가족의 공간이었던
곳으로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핵심 공간입니다.
원래는 7개의 공간으로 훨씬 큰 궁전이었으나 철거되고 3개의 궁만 남았어요.

왕의 집무를 보던 방으로 벽면의 타일, 천장의 석회 세공 등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내게 됩니다.
타일을 붙인 것은 더운 열기를 식히기 위한 것이예요.

메수아르의 방을 나오면 아라야네스 중정으로 이어집니다.
연못 옆으로 아라야네스(천국의 꽃)가 심어져 있어요. 여기서는 연못 남쪽에 서서 바라 봐야
좋은데 정면의 가늘고 우아한 석주가 지탱하는 7개의 아치를 감상하고 윗쪽으로 45미터의
코마레스탑과 그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 그리고 연못으로 그대로 비치는 수면 위의 모습도
감상해야 합니다.

코마레스 탑으로 들어가면 대사의 방이 나오는데 왕궁에서 가장 넓은 정사각형의
방으로 여러나라 사절들의 공식 행사가 있던 곳이예요.
탑의 발코니에서는 사크로몬테 언덕(집시 동굴)과 알바이신 지구가 한눈에 보입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여왕에게 신대륙 탐험 임명장을 받은 곳이기도 해요.

왕궁 관람의 하이라이트, 사자의 중정이예요.
이 중정을 에워싸는 방과 시설은 왕의 사적 공간으로 이곳 통틀어 사자의 궁전이라
부르고 왕이외에 다른 남자는 출입 금지 된 곳으로 하렘(Harem)이라 불렀습니다.
124개의 대리석 기둥과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회 세공으로 가득한 아치들, 중앙에는
12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원형 분수가 있어요.
아치는 아랍의 야자수를 표현한 것입니다.

원래 시간마다 다른 사자에서 물이 나와 시간을 알 수 있었는데 원리를 알아보려고
해체한 후 복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막출신 무어인들에게는 물이 흐르는 곳이 천국이란 개념이 있기에 궁전
곳곳에 물을 끌어 들였고 뜨거운 더위를 식히는데도 활용하였어요.
이 분수의 물이 아래 대리석 바닥 수로를 통해 각 방으로 돌게끔 설계 되었으니
놀라울정도로 과학적입니다.

15세기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한 남자가 왕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 발각 되어
분노한 왕이 그 가문 30여명의 남자들을 초대하고 이 공간에서 참수한 비극적인 공간이예요.

중정 남쪽 아벤세라헤스의 방과 북쪽의 두 자매의 방은 둥근 천장에
모카라베양식의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곳에는 왕비나 후궁이 살았어요.

워싱턴 어빙이 이 방에 묵으며 알함브라 이야기를 쓰고 알함브라 궁전을
세상에 알리게 했습니다.
스페인 정부에서 그 공을 인정하여 방을 꾸며 놓았어요.

나스르 궁전을 나오면 파르탈 궁전과 정원이 나오는데 기둥이 있는 현관이란 뜻이예요.
다른 궁전에 비해 사방이 뚫려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5개의 아치를 가진 귀부인의
탑이 있고 정원은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연못에 비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요.
▶헤네랄리페 정원


무함마드 3세 때 만들어진 헤네랄리페 정원에는 온갖 풀, 꽃, 나무들이 수로를 따라
가득한 여름 별궁 입니다.
수로 양옆의 분수에서 뿜어져 나와 아치를 그리며 수로로 떨어지는 물줄기와 물소리가
아름다워요.
알함브라의 추억이라는 기타 연주곡이 여기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 알함브라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 *

프란시스코 타레가(1852 ~ 1909)는 스페인 출신기타 연주자 겸 작곡가으로
클래식 기타계에서 현대 기타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가 입니다.
1896년 타레가는 제자이자 유부녀인 콘챠 마르티네스라는 부인을 짝사랑하여
고백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실의에 빠져 여행을 떠나고 알함브라에 오게 돼요.
그는 이 도시의 매력에 빠졌고 말라가로 가서 그라나다에서 받은 인상을 오선지에
옮겨 그녀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이 곡은 연주시간 5분 전후의 짧은 소품으로 구조도 아주 단순하고 간결한데
내면에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은은함과 화려함, 애수가 담겨져 있어
마음을 뭉클하게 해요.
그속에 낙원 같았던 알함브라를 멀리서 되돌아 보며 탄식하던 이슬람의 마지막 왕
보압딜의 눈물과 회한의 슬픈 추억이 어려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클래식 기타 매니아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 알함브라 이야기 *

워싱턴 어빙(1783~ 1859)은 미국의 수필가, 소설가, 역사가, 외교관으로
1826년부터 마드리드에서 근무하며 스페인을 연구하였고 기독교도들 사이에
폐허로 벼려졌던 알함브라 궁전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예요.
알함브라 궁의 모습, 이곳에 얽힌 무어인들의 전설을 담아 출판하였고 이책을
읽고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스페인 정부에서 무관심으로 방치 되어 있던 알함브라를
대대적으로 복구 하게 되었어요.
그림과 사진을 함께 수록하여 아름다운 정원과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찬 알함브라를
생생히 엿보게 해줍니다.
작가는 찬란했던 이슬람 문화를 묘사하고 그라나다를 떠나는 무어이들의 한숨과
슬픔도 이야기 하고 있어요.

* 그라나다의 함락 *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스 (1848 ~ 1921)는 로마 주재 스페인 아카데미
원장으로 프라도 미술관 관장을 역임 했어요.
1822년에 그린 것이며 현재 스페인 상원 의사당 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를 떠나는 이슬람 술탄 보압딜로부터 항복을
받는 장면을 그렸어요.
뒷쪽으로 그라나다의 상징 알함브라가 보이고 목숨을 건진 보압딜은 열쇠를
건네 주려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요.

* 그라나다 토후국 *
1228년 아모하드 왕조가 기독교인에 패배된 후 왕자였던 이드리는
이베리아를 떠났고 1236년 코르도바 재정복이 이루어지면서 레콩키스타가
완성 되어 가자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무함마드 1세)가 나스르 왕조를 창건하고
카스티야에게 보호 받을 것을 청하면서 보호국으로 남게 되었어요.
이것이 그라나다 왕국의 출발이고 250년간 카스티야 왕국의 보호국으로 존재했으며
기독교 군주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1238 ~ 1273 - 무하마드 1세.
1484 ~ 1492 - 무하마드 12세.
가장 오래도록 이베리아 반도내 이슬람 국가로 남았으며 나스르 왕조가 존재하는 동안
그라나다는 번영을 누렸어요.
아랍어가 공용어 였고 그라나다는 수십년간 카스티야 왕국의 항구 역할을 했으므로 이슬람
왕국과 연결 통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남아프리카 일대 국가와 금교역을 하는데 중요한 교역로 였어요.
하지만 포루투갈이 아프리카로 통하는 직로를 개척으로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입장에서는
그 중요성이 갈수록 떨어졌고 1479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통합하자 북서 아프리카국들이
그라나다를 지배하려는 조짐을 보이기도 합니다.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 지도자이던 무하마드12세가 항복하면서 통치권을
넘겨주었어요.
▶나스르 왕조 (1232 ~ 1492)
아랍계 나스르족 무하마드가 세운 왕조. 수도가 그라나다여서 그라나다 왕조라고도 해요.
1236년 코르도바가 점령 당하자 남쪽으로 후퇴하여 북쪽은 시에라네바다 산지 남쪽은
알케리아로부터 지브롤터에 이르는 해안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영유하였습니다.
1323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축조된 알함브라 궁전과 그라나다 학원을 중심으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였어요.
1492년 정복 되어 최후의 술탄 무하마드 12세는 모로코로 망명 하였으며 이왕조는
21대에 멸망하였습니다.
* 무함마드 12세 (1460 ~ 1533) *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최후의 군주이자 이베리아 무슬림 최후의 군주입니다.
그의 항복으로 이베리아 최후의 무슬림은 멸망하였고 가톨릭 레콩키스타가 완료
되었어요.
아부 압둘라의 스페인식 발음인 '보압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의 아들로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이어지던 1482년 모친
아이샤와 함께 부왕에 반기를 들어 즉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카스티야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부왕이 복위하였어요.
이사벨 1세에 복속하여 석방된 무함마드12세는 카스티야와 동맹하여 아버지와
그의 후계자 무함마드 13세(작은 아버지)와 내전을 벌였습니다.
그틈에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군은 1487년 그라나다 서부를 완전 정복 하였고
무함마드12세 역시 그라나다를 장악하여 복위 할 수 있었어요.
주군인 이사벨 1세가 무함마드 13세 축출후 기존 영토를 반환 할 것이라 여긴
무함마드12세는 여전히 무함마드13세의 수중에 있던 동부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아예 기독교 연합군을 돕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1489년 동부를 완전 정복한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예상과 달리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자 무함마드12세는 복속을 철회하고 선전포고를 하며 맞섰으나
오히려 그라나다에서 포위 되었어요.
6개월의 공방전 끝에 항복하였고 이로써 그라나다 토후국은 멸망 하였습니다.
폐위후 알푸하라 영지로 은퇴한 그는 후일 모로코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 1차 치세
무함마드는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와 아이샤( 무함마드 9세 딸로 추정)의 아들로
1470년대에 들어 아버지가 기독교 출신의 후처를 총애한 것에 불만을 품은 모후와
음모를 계획합니다.
1482년 부왕이 페르난도 2세와 맞서 궁을 비운 사이 정변을 일으켜 술탄이 되었어요.
부왕이 말라가를 거점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카스티야의 침공에 있어 전공을 세우자
불안해진 무함마드는 코르도바 방면의 루세나를 공격했으나 패배합니다.
철수 도중 낙마 하여 진창에 빠진 말을 구하려다 사로 잡히고 부왕이 다시 복위하여
그라나다는 재통합 되는 듯 했어요.
한편 무함마드는 페르난도와 친해졌고 페르난도는 그라나다의 내전을 재개 시키기
위해 복속과 배상금 납부의 조건하에 무함마드를 석방하였습니다.(코르도바협정)
1483년 가을 무함마드가 안달루스 알로라, 세테닐 등을 점령하였고 알메리아에서
동생 유스프와 재회하였어요.
뇌전증으로 인해 병약해진 부왕은 동생 무함마드 앗 - 자갈에게 병권을 맡겼고 그는
알메리아로 진격합니다.
무함마드는 유수프를 그곳에 남기고 원군을 청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진영으로
향하였으나 원군이 편성되기 전에 도시가 함락되고 유수프는 처형 되었어요.
그해 봄 지속되는 내전을 틈타 스페인군은 그라나다 서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는 대포를 앞세운 15 일간의 공성전 끝에 그라나다
서부의 거점 론다를 점령하며 뒤이어 그라나다의 해군 기지인 마르베야도 함락 되어
그라나다의 서부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 됩니다.
같은해 6월 중병에 걸린 부왕은 동생 앗 자갈에게 양위하여 무함마드 13세로 즉위해요.
그해 말 무함마드는 그라나다 시내의 알바이신을 장악했으나 앗 자갈에게 패배하고
유력 가문들의 중재로 협상에 나선 양측은 대의를 위해 내전의 중단에 합의 합니다.
무함마드는 중서부의 로하를 영지로 받게 되지만 그해 5월 스페인군이 로하를 점령하며
무함마드는 재차 포로가 돼요.
페르난도는 무함마드 복속 조건을 구체화하여 그가 스페인을 도울 것을 명시하고
약속과 함께 석방된 무함마드는 비밀리에 페르난도와 연락을 취하며 그해 알바이신에
침투, 지지세력을 모았습니다.
1487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그라나다 최대 항구이자 서부의 마지막 거점인 말라가의
점령을 위해 그동쪽 관문을 포위 하니 무함마드의 병력은 스페인군을 도왔고 반대로
앗 자갈은 친히 구원에 나섰습니다.
무함마드13세는 알바이신 무함마드를 견제하기 위해 알함브라에 상당수의 수비대를
남겨야 했기에 제한된 병력만을 차출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에
의해 격퇴 되었어요.
이에 절망한 말라가의 수비대는 10일만에 목숨 및 재산 보장의 조건하에 항복하게
됩니다.
한편 앗 자갈의 우려대로 그의 부재를 틈타 무함마드는 알함브라를 장악하였어요.
* 그라나다 멸망전
말라가에서의 패전보를 접한 귀족들은 별 저항없이 무함마드의 복위를 인정하였고
이를 확인한 앗 자갈은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하는 동부로 향하였습니다.
복위후 같은해 5월 무함마드는 재차 페르난도와 접촉하여 함께 앗 자갈에 맞서고 그의
수중에 있는 동부지방을 얻는 댓가로 그라나다를 할양한다는 협정을 맺어요.
페르난도는 말라가에 두차례 관대한 조건하의 항복을 제안 했으나 모두 거절 당하자
포위망 구축에 나서고 동부에 있던 앗 자갈은 말라가에 원군을 보내었으나 카스티야를
돕기로한 무함마드는 약속대로 이를 격퇴시킵니다.
* 말라가 공방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수비대는 맹렬히 저항하였고 페르난도 역시 알헤시라스의
폐허에서 한세기 반 전에 쓰인 석조 포환들을 회수하여 재사용할 정도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포위가 장기화 되자 이사벨 역시 남편과 합류하여 스페인군의 사기를 높였고 후일
그들과 사돈이 되는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도 플랑드르 선박을 통해 군수품을
전달하였어요.
여름이 다가오자 페르난도는 공성탑을 만들고 땅굴을 파서 성벽을 돌파하려 했으나
수비대는 기습으로 공성탑을 파괴하고 반대편에서 땅굴을 파는 등 포위측의 모든
시도를 무산시켰습니다.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 병사들은 보복을 두려워 하며 필사적으로 싸웠어요.
3개월의 접전 끝에 스페인군은 해자에 놓인 다리의 성탑을 점령하였고 성내에서는
식량이 고갈되어 개와 고양이는 물론 과실수의 잎을 따먹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협상끝에 도시는 페르난도의 자비에 맡기며 무조건부로 항복하였고 페르난도는 저항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1만 5천에 달하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를 삼았어요.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병사들은 배교에 대한 보복으로 막대기에 관통되거나
화형을 당하는 등 잔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앗 - 자갈의 항복
스페인군은 1489년 5월 동부의 최대 도시 바자를 포위하였어요.
앗 자갈은 친히 수비를 맡으며 방어 의지를 보였고 과거부터 요새화 되어 두터운
성벽이 둘러진 바자는 대포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 등 견고함을 자랑하여 공성전은
장기화 되었습니다.
포위군은 재정난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 되었을 때 이사벨이 포위측에 가담하였고
카스티야군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앗 자갈은 말라가와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수비 병력이 건재했음에도 그해 12월 항복하기로 결정해요.
말라가와 달리 바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우를 받았고 앗 자갈은 스페인의 봉신이
되어 남은 영토인 과디시와 알메리아를 넘긴후 알푸하라로 은퇴하였어요.
1490년 앗 자갈은 안달루스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 군대를 모아 돌아오려 했으나
이듬해 무함마드의 청탁을 받은 와타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압둘라 앗 셰이크 무함마드에
의해 체포 되어 실명 당한후 1494년 자얀 왕조령 틀렘센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 대 카스티야 전쟁과 멸망
왕국의 동부를 모두 정복한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코르도바로 회군합니다.
한편 무함마드는 카스티야가 약속과 달리 동부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어요.
특히 동부중에서도 그의 영토이던 벨레즈 루비로와 벨레즈블랑코, 베라가 1488년
6월에 점령된 후 스페인 귀족들에게 분배된 것에 동맹의 진위를 의심 하였습니다.
1490년대 초 페르난도는 무함마드에게 약속대로 그라나다 양도를 요구하였어요.
무함마드는 이를 거부하였고 더 나아가 카스티야에 대한 조공과 복속을 철회하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페르난도는 코르도바에 최대 8만 병력을 집결 시켰고 1490년 여름 그라나다 부근의
베가평원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 나섰어요.
스페인군은 일대의 농경지와 마을들을 대대적으로 방화하여 그 연기가 알함브라를
뒤덮었고 그라나다 외곽의 과수원과 정원들도 페허로 변하였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15인의 스페인 특공대가 그라나다에 침투하여 시장에 불을 질렀어요.
오직 그라나다 알푸하라스 산지만을 지니고 있던 무하마드에 있어 임박한 카스티야의
침공은 중과부적으로 여겼기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모로코의 와타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이집트는 이미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아라곤 카스티야와 동맹한
상태였고 와타스조에서는 아예 회신이 없었어요.
1년여간 준비를 마친 페르난도는 1491년 4월1일 그라나다 서쪽 8키로 지점인 베가
평원에 거대한 병영도시인 산타 페(성스러운 신앙, 거룩한 믿음)를 세웠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그라나다를 온전한 상태로 얻고자 했던 그는 직접적인 공격대신 포위를
통해 수비대를 고사시켜 항복 시키려는 의도였지요.
산타 페는 거리 구획이 나뉜 도시로 계획 되었고 이사벨라와 자녀들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도 입주하여 그라나다 점령에대한 의지를 보입니다.
산타 페 건설로 그라나다 조정은 술렁였고 귀족들은 항복을 두고 대립하게 되어 그해
7월 무함마드는 기병을 이끌고 출전 하였으나 패배, 이후 수성으로 일관하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어요.
이전의 초토화로 인해 제대로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그라나다는 점차 기근에 시달렸고
결국 무함마드는 연로한 시장을 사절로 보내 협상에 나섰습니다.
양측은 40일간 휴전을 맺었고 무함마드는 그동안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약속하였어요.
10월5일 휴전이 만료된후 그라나다 조정은 항복을 논의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던 한 무사는 항복이 결정되자
귀가하여 무장한 후 엘비라 성문을 통해 홀로 출정하였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1491년 11월 25일에 체결된 그라나다 조약은 항복을 댓가로 무슬림들에게 종교와
사법의 자치가 주어지는 관대한 조건을 보장하였습니다.
카스티야 출신의 개종, 망명자들 역시 처벌없이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서부지역)로의
이주가 허락 되었어요.
무함마드는 2달간의 유예기간후 가톨릭 국왕 부부에 복속하기로 했으나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그는 1492년 1월 1일에 후문을 통해 알함브라에 스페인 병력을 들여 놓았습니다.
1월 6일 스페인군은 공식적으로 그라나다에 입성하였고 무함마드는 측근 및 가족들을
대동하여 알함브라를 떠나 영지로 주어진 알푸하라로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 무함마드가 "나의 왕국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이 아름다운 궁전을 다시
못 보는 것이다" 라는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리자 모친 아이샤가 지키지 못한 왕국에
대해 여인처럼 울면 뭐하냐며 질책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 망명과 죽음
알푸하라의 라우하르 데 안다락스에 머물던 무함마드는 18개월 후인 1493년 여름
1130명의 수행원 및 측근들과 함께 아드라항을 통해 안달루스를 떠났어요.
모로코 멜리야 인근의 카자자에 상륙한 그는 페스로 향하여 와타스 술탄 앗 셰이크
무함마드의 환대를 받았고 그곳에 알함브라와 비슷한 궁전을 지어 살다가 40년을 살고
1533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 평가
무함마드12세는 카스티야에 복속하여 왕국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어요.
1490년 전까지 양측은 서로를 공략하기는커녕 지원군을 보내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바자 함락후 카스티야 아라곤 연합군은 그대로 회군하려 하였으나 무함마드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에서 복속을 철회하며 전쟁을 일으키니 그의 과욕과 현실에
대한 오판이 결국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세번이나 내전을 일으켜 왕국을 약화시킨 것도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스스로 망국을
초래하였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무함마드12세는 친부와 숙부와도 내전을 벌였고 마지막에는 친구이자 적인 페르난도와
싸우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어요.
역사적으로 그라나다의 마지막왕이자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왕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다니 참으로 불행하네요.
여생의 몸은 편안했을지라도 평생 회한과 함께 마음은 지옥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